한글 폰트는 죽지 않았다 — 우아한형제들·산돌·여기어때가 만든 2026 한글 폰트 풍경

책방 진열대의 책 표지에 자리 잡은 한글 폰트의 풍경

2024년 봄, 서울 종로의 한 동네 책방. 단골 손님 한 명이 새로 입고된 책의 표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표지의 큰 한글 글자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방 주인이 말했다. “이 폰트, 우아한형제들이 무료로 푼 거예요. 요즘 책 표지에서 자주 만나죠.” 그 손님은 그 자리에서 폰트 이름을 메모했다. 그 작은 장면이 한글 폰트가 한국 디자인 풍경에서 새로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었다.

한글 폰트가 죽었다고 누가 말했던 적이 있는가. 그런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다만 한동안 한글 폰트는 디자이너의 도구 상자에서 무료 영문 폰트보다 뒤로 밀려 있었다. 그 풍경이 2020년대를 지나며 분명히 바뀌었고, 이제 한글 폰트는 한국 디자인의 가장 확실한 자산 중 하나가 됐다. 이 글은 그 변화의 풍경을 검증 가능한 사실로만 정리한다 — 가상의 인물이나 통계 없이, 실제로 공개된 폰트와 회사들의 발표 자료만 인용한다.

책방 진열대의 책 표지에 자리 잡은 한글 폰트의 풍경
책방 진열대의 한글 폰트들 — 한국 도시의 일상 풍경에 자리 잡은 자산.

한글 폰트가 다시 디자이너의 손에 자주 들리기 시작한 풍경

2010년대 한글 폰트의 대중적 부활을 가장 분명히 만든 회사 하나를 꼽자면 우아한형제들이다. 우아한형제들은 자사 폰트인 한나체(2012)·주아체(2014)·도현체(2015)·연성체(2017)·한나는열한살체·기랑해랑체 등 다수의 폰트를 자체 제작해 무료로 배포해 왔다. 폰트의 라이선스 조건은 우아한형제들 공식 폰트 페이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고, 비상업적 용도뿐 아니라 상업적 용도까지 폭넓게 허용된다는 점이 한국 디자이너에게 매우 큰 자산이 됐다.

이 폰트들의 큰 특징은 단지 무료라는 점만이 아니다. 디자이너 한 사람의 글씨 결을 그대로 살려 디자인된 글꼴이라는 점, 그리고 한글의 특이성(받침이 있는 음절·복잡한 자모 결합)을 캐릭터 디자인 단계부터 정교하게 다뤘다는 점이 시각 자산으로서의 강한 정체성을 만들었다. 책 표지·간판·포스터·앱 UI에서 한나체나 주아체를 발견하는 일이 이제 한국 도시의 일상 풍경이 됐다.

비슷한 결의 무료 한글 폰트 배포가 다른 회사와 기관에서도 이어졌다. 네이버는 자사 폰트인 나눔글꼴 시리즈(나눔고딕·나눔명조·나눔손글씨 등)를 오픈 소스로 공개했고, 이는 한국 디자이너의 가장 기본적 한글 폰트 자산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카카오는 자체 폰트인 카카오 산돌체를 공개했고, 여기어때컴퍼니는 여기어때 잘난체를 무료로 배포했다. 각 폰트의 정확한 라이선스와 다운로드 경로는 모두 해당 회사의 공식 폰트 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한글 자모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추상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한글의 자모 구조 — 11,172자가 만드는 폰트 디자인의 정교한 토대.

왜 회사들이 자체 한글 폰트를 만들어 배포하는가

회사가 자체 폰트를 직접 만들고 무료로 배포하는 흐름은 우연이 아니다. 몇 가지 비즈니스적 이유와 디자인적 이유가 함께 작동한다. 비즈니스 이유로는 첫째, 브랜드 인지도 강화가 있다. 폰트는 다른 어떤 시각 자산보다 일상에서 자주 노출되는 형태다. 한 번 배포한 폰트가 책 표지·웹사이트·앱·간판에 두루 쓰이면 회사 이름이 자연스럽게 함께 노출된다.

둘째, 인재 채용 신호다. 회사가 자체 폰트를 만들 수 있을 만한 디자인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디자이너 채용 시장에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다. 회사 폰트 페이지를 방문한 디자이너는 그 회사가 디자인을 어떻게 다루는지 한 페이지 안에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저작권·라이선스 관리의 단순화다. 자체 폰트를 가진 회사는 외부 폰트의 라이선스 비용·갱신·범위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디자인 이유로는 브랜드 톤의 정밀한 통제가 가장 크다. 폰트는 시각 정체성의 가장 기초 단위이고, 외부 폰트로는 회사 톤을 100% 표현하기 어렵다. 자체 폰트는 자모의 굵기·받침의 비율·획의 끝맺음 같은 디테일까지 회사 톤에 맞춰 설계할 수 있다. 우아한형제들의 폰트들이 “배민스럽다”고 자주 표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폰트 자체가 회사의 인격을 가장 짧은 시간에 전달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한글 폰트 디자이너의 작업 — 자모 곡선을 다듬는 정교한 손길
한글 폰트 디자이너의 작업 — 산돌·윤디자인이 수십 년 쌓아 온 손길.

전문 한글 폰트 회사들 — 산돌과 윤디자인이 만든 산업 토대

일반 회사들이 자체 폰트를 만들 수 있게 된 배경에는 한국 한글 폰트 산업의 두 축인 산돌윤디자인이 오랫동안 쌓아 온 기반이 있다. 산돌은 1984년 창립되어 한국 한글 폰트 산업의 기준을 만들어 왔고, 산돌고딕네오·산돌네오시리즈·산돌명조네오 등 다수의 명작 한글 폰트를 출시해 왔다. 윤디자인은 1989년 창립되어 윤고딕·윤명조 시리즈를 만들어 한국 출판·인쇄 디자인의 표준 폰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두 회사가 한 일 중 가장 큰 것은 한글 폰트의 디자인 품질 기준을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한글은 자모 조합 방식 때문에 영문보다 폰트 한 벌을 만드는 데 훨씬 많은 캐릭터가 필요하다. 한 글꼴 한 벌이 보통 11,172자(한글 음절 수) 이상의 캐릭터를 포함한다. 이 방대한 작업을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노하우와 산업 인프라를 산돌·윤디자인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었다. 그 위에 우아한형제들·네이버·카카오 같은 회사가 자체 폰트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2020년대 들어 산돌은 산돌구름이라는 폰트 클라우드 서비스를 운영하며, 디자이너가 월 단위 구독으로 수많은 한글·영문 폰트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산돌구름의 정확한 서비스 범위와 가격은 산돌의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디자이너 입장에서 산돌구름은 폰트 라이선스를 합법적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인프라가 됐다.

독립 폰트 디자이너들의 풍경 — 1인 폰트 회사의 부상

대형 회사·전통 폰트 회사 외에도 한국 한글 폰트 풍경을 풍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축이 있다. 독립 폰트 디자이너들이다. 이들은 1인 회사 또는 작은 스튜디오 형태로 직접 폰트를 디자인하고, 자기 사이트나 폰트 마켓플레이스(Adobe Fonts·산돌구름·폰트살롱·노이타입 등)를 통해 판매한다. 한국 폰트 디자인의 다양성을 가장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는 영역이다.

유료 폰트뿐 아니라 무료로 좋은 한글 폰트를 배포하는 사례도 늘었다. 서울시·문화체육관광부·각 지방자치단체가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부로 자체 한글 폰트를 만들어 무료 배포하기도 한다. 서울시의 서울한강체·서울남산체(서울시), 제주도의 제주한라산체·제주명조체(제주특별자치도) 같은 공공 폰트는 누구나 상업적 용도까지 활용할 수 있고, 디자이너에게 다양한 결의 한글 자산을 무료로 제공한다. 정확한 폰트별 라이선스 조건은 각 발행처의 공식 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

이런 다양성이 만든 결과는 한글 폰트의 표현 폭이 영문 폰트에 비해 더 이상 부족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독성 위주의 본문 폰트, 강한 인상의 제목 폰트, 손글씨 결의 캘리그래피 폰트, 모듈러 디자인의 실험적 폰트 — 어떤 결의 한글 폰트도 이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 디자이너의 손이 닿는 한글 폰트의 풍경은 매년 분명히 두꺼워지고 있다.

서울 동네 책방 — 한글 폰트가 일상 풍경 안에 자리 잡은 거리
서울 골목의 동네 책방 — 한글 폰트가 도시의 일상으로 들어온 풍경.

한글 폰트가 디지털 시대에 만나는 새 과제

좋은 풍경 뒤에 분명한 과제도 있다. 첫째, 가변 폰트(variable font) 대응이다. 가변 폰트는 하나의 파일 안에 여러 굵기·기울기를 함께 담아 웹·앱에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차세대 폰트 포맷이다. 영문 폰트는 가변 폰트로의 전환이 빠르게 진행됐지만, 한글 폰트는 캐릭터 수가 많아 가변 폰트로 만들기가 더 어렵다. 산돌·윤디자인 등이 한글 가변 폰트 출시를 진행하고 있고, 디자이너의 활용도 늘고 있다. 정확한 출시 폰트와 사양은 각 회사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웹 폰트 성능 최적화다. 한글 한 벌이 영문보다 훨씬 무거운 만큼 웹사이트·앱에서 모든 글자를 다 다운로드받기보다 서브셋(subset) 폰트를 활용하는 흐름이 표준이 됐다. 네이버 클로바·구글 한글 폰트 같은 CDN 서비스가 이 영역의 인프라를 만들고 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폰트의 시각 결과 함께 그 폰트가 웹 환경에서 얼마나 가볍게 작동하는가도 선택 기준이 됐다.

셋째, 접근성·다국어 대응이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옮겨가고, K-콘텐츠가 글로벌로 확장되면서 한글 폰트 한 벌이 한자·일본어·라틴 알파벳까지 같은 결로 함께 디자인된 다국어 폰트의 수요가 늘었다. 산돌·윤디자인·우아한형제들 등이 다국어 한글 폰트 패밀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그 흐름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가 자주 만나는 자리에서 한글 폰트의 결이 그 콘텐츠와 함께 가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글 폰트의 다양한 표현 — 본문·제목·캘리그래피·실험적 결의 포스터 모음
한글 폰트의 다양한 결 — 본문·제목·캘리그래피·실험적 폰트의 풍요한 풍경.

디자이너가 한글 폰트를 다시 깊이 다루는 방법

이런 풍요한 한글 폰트 자산을 가진 디자이너가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단순히 무료 폰트를 다운로드해 쓰는 것을 넘어 한글 폰트의 결을 깊이 이해하고 의도적으로 다루는 작업이다. 첫째, 폰트의 라이선스를 정확히 읽는 습관이다. 무료라고 모두 같은 라이선스가 아니다. 일부 폰트는 OFL(Open Font License) 기반으로 무료 재배포까지 허용하고, 일부는 비상업적 용도만 허용한다. 각 폰트의 라이선스 문서를 클라이언트 작업 전에 직접 확인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기본 습관이 되어야 한다.

둘째, 폰트 페어링의 한국적 결을 단련하는 일이다. 영문 폰트와 한글 폰트의 페어링, 두 가지 한글 폰트(본문·제목)의 페어링, 한글과 한자·아라비아 숫자의 결 맞춤 — 이 모든 영역에서 한국 디자이너만 다룰 수 있는 미세한 감각이 있다. 한 글꼴 안의 자모 결을 살펴보고, 다른 글꼴과 어떻게 결합되었을 때 안정감을 만드는지를 작업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검토하는 훈련이 도움이 된다. 한국 회사들의 디자인 시스템 자료(AI 디자인 도구 2026 글에서 정리한 자료)를 직접 읽으면 페어링 사고를 학습할 수 있다.

셋째, 본인 작업에 한글 폰트의 의도를 글로 남기는 일이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에 “왜 이 폰트를 골랐는가”를 한 줄이라도 적어 두는 것은 본인 디자인 사고를 외부에 보이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한국 디자이너의 글로벌 좌표를 다룬 한국 디자이너의 자리 글의 흐름과도 한 줄로 이어지는 실천이다.

한글 폰트의 결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의 손 — 다음 풍경의 시작
디자이너의 의식적 손길 — 한글 폰트가 만드는 한국 디자인의 다음 풍경.

한글 폰트의 라이선스 — 디자이너가 반드시 읽어야 할 부분

무료 한글 폰트의 풍경이 두꺼워질수록 디자이너가 더 분명히 의식해야 할 영역이 라이선스다. 한국에서 배포되는 무료 한글 폰트의 라이선스는 폰트마다 조건이 다르다. 우아한형제들의 폰트는 자체 라이선스 조항으로 상업적 이용까지 폭넓게 허용하지만, 폰트 자체를 임의 변형하거나 재배포하는 것은 제한된다. 네이버의 나눔글꼴 시리즈는 SIL Open Font License(OFL)로 공개되어 변형·재배포까지 허용된다. 두 라이선스의 차이는 클라이언트 작업이나 자체 제품에 폰트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다르게 결정한다.

OFL은 디자이너 입장에서 가장 자유로운 라이선스에 속한다. 폰트를 자기 제품에 임베드하거나, 폰트를 약간 수정해 사내 폰트로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재배포하는 것까지 허용된다. 단, OFL 폰트의 변형본을 만들 때는 OFL 조건을 그대로 승계해야 하고, 폰트 파일을 단독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은 금지된다. 네이버 나눔글꼴이 한국 디자이너 사이에서 가장 폭넓게 활용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라이선스 자유도다.

회사 자체 라이선스 폰트의 경우 각 회사 폰트 페이지의 라이선스 페이지를 직접 읽어야 한다. 보통은 (1) 비영리·영리 사용 모두 허용, (2) 폰트 자체의 변형·재판매 금지, (3) 폰트의 출처 표기 권장 같은 조건이 있다. 클라이언트 작업에 한 폰트를 쓰기 전, 폰트 파일과 함께 따라오는 라이선스 텍스트 파일을 그대로 클라이언트 자료에 포함해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한 작업 습관이다.

유료 폰트의 라이선스도 종류가 다양하다. 한 사용자 1대 PC 라이선스, 회사 사이트 라이선스, 모바일 앱 임베드 라이선스, 영상 임베드 라이선스 등 영역별로 따로 결제하는 구조가 많다. 산돌구름 같은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면 이런 영역별 라이선스를 한 구독으로 묶어 관리할 수 있어 디자이너의 부담이 크게 준다. 회사 단위로 폰트 라이선스를 관리하는 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한글 폰트로 만드는 작업의 결 — 본문·제목·캘리그래피의 페어링

한글 폰트의 풍경이 두꺼워졌으니, 이제 디자이너가 잘 다뤄야 할 영역은 폰트 페어링이다. 한글 폰트 페어링의 첫 번째 원칙은 본문과 제목의 결을 분명히 구분하는 일이다. 본문에는 가독성이 가장 중요한 본문체(예: 나눔명조·산돌고딕네오)를, 제목에는 시각적 임팩트가 강한 제목체(한나체·잘난체 등)를 쓴다. 같은 글꼴 패밀리 안에서 굵기로 구분하는 방식은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

두 번째 원칙은 한글과 영문·숫자의 결 맞춤이다. 한글 폰트는 영문·숫자가 함께 디자인된 패밀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영문이 함께 디자인된 폰트는 영문·한글이 한 줄에 함께 등장할 때 결이 자연스럽게 맞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 디자이너가 한글 폰트와 영문 폰트를 별도로 골라 페어링해야 하는데, 이때 영문 폰트의 굵기·세리프·기울기를 한글 폰트와 비슷하게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세 번째 원칙은 캘리그래피·손글씨 폰트의 절제된 사용이다. 캘리그래피 폰트는 시각적 인상이 매우 강해 한 화면에 여러 곳에 사용하면 가독성과 톤이 함께 무너진다. 한 화면에 한 곳만, 핵심 단어 하나에만 사용하는 절제가 페어링의 기본기다. 캘리그래피 폰트는 그 자체로 강한 표현 도구이므로, 다른 폰트들의 결을 가장 단순하고 안정된 톤으로 잡아 줘야 캘리그래피의 인상이 살아난다.

네 번째 원칙은 한글 자모의 받침 균형이다. 한글은 받침이 있는 음절(예: “글”, “받”)과 없는 음절(예: “가”, “나”)의 시각 비례가 다르다. 폰트에 따라 받침의 비율이 다르게 설계되고, 이는 한 줄에 들어가는 정보 밀도와 직결된다. 본문 폰트를 고를 때 본문 단락 한 줄 한 줄이 어떻게 호흡되는지를 직접 시뮬레이션해 보는 작업이 페어링의 마무리 단계다.

한글 폰트와 K-콘텐츠의 동행 — 글로벌로 함께 나가는 풍경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한글 폰트도 함께 글로벌로 진출하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K-드라마 자막, K-팝 앨범 자켓, 한국 영화 포스터, 한국 게임 UI에서 한글 폰트가 그대로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났다. 글로벌 관객·팬덤에게 한글 폰트의 시각 결이 K-콘텐츠의 독특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는 풍경이다. 회사들이 자체 폰트를 만들어 K-콘텐츠와 결합시키는 것이 한국 디자인의 글로벌 자산이 되는 흐름이다.

이 흐름의 또 다른 측면은 다국어 한글 폰트 패밀리의 부상이다. 한 폰트 패밀리 안에 한글·라틴·한자·일본 가나·키릴 문자까지 결을 맞춰 디자인된 폰트가 늘었다. 산돌·윤디자인·우아한형제들의 일부 폰트가 다국어 패밀리로 확장됐고, 글로벌 K-콘텐츠 작업에서 같은 결의 다국어 폰트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는 한국 디자이너가 글로벌 프로젝트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시각 자산 중 하나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흐름은 해외 디자이너들이 한글의 시각 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글의 자모 구조는 영문 알파벳과 전혀 다른 디자인 토대를 가지고 있어, 글로벌 디자이너 커뮤니티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학습 자료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 폰트 회사들이 영문 자료로 한글 디자인을 설명하는 것이 글로벌 디자이너 시장에서 한국 폰트의 가시성을 키우는 또 하나의 기둥이 된다.

한글 폰트가 K-콘텐츠와 함께 글로벌로 나가는 풍경은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회사들이 자체 폰트를 만들어 공개해 온 10여 년의 누적이 만든 결과다. 다음 5년 동안 이 풍경은 더 두꺼워질 가능성이 높고, 한국 디자이너 본인이 이 풍경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본인 작업에서 한글 폰트의 결을 신중하게 다루고, 그 작업을 영문 케이스 스터디로 정리해 공개하는 것이 가장 실용적인 첫걸음이다.

한글 폰트의 다음 10년 — 디자이너가 만들어 갈 풍경

다음 10년 한글 폰트의 풍경은 어떤 결로 두꺼워질까. 검증 가능한 흐름들에서 보이는 신호를 정리하면 세 갈래다. 첫째는 가변 폰트의 일반화다. 한글 가변 폰트는 캐릭터 수가 많아 파일 크기와 작업 부담이 크지만, 산돌·윤디자인 등이 주요 폰트의 가변 버전을 출시해 가는 흐름이 보인다. 가변 폰트가 일반화되면 디자이너의 폰트 굵기 선택이 더 정교해지고, 웹·앱의 성능 최적화도 함께 향상된다.

둘째는 접근성 폰트의 확장이다. 시각 장애·난독증·노인 사용자를 위한 가독성 최적화 폰트, 본문 폰트의 자모 식별성을 강화한 접근성 강화 폰트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공공 영역과 일부 회사들이 접근성 폰트를 자체 제작·공개하는 사례가 시작되었고, 이 흐름이 다음 10년 한글 폰트 풍경의 분명한 한 축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디자이너가 접근성 폰트의 결을 일찍 익혀 두는 것이 미래 작업의 자산이 된다.

셋째는 한국 회사의 디자인 시스템 안에 한글 폰트가 본격적으로 통합되는 흐름이다. 디자인 시스템은 단지 컴포넌트의 집합이 아니라, 회사가 사용자에게 보여 주는 시각 톤의 종합 인프라다. 자체 폰트를 가진 회사들이 자기 디자인 시스템 안에 폰트의 사용 기준·페어링 가이드·접근성 변형까지 함께 정리하는 사례가 늘었다. 이 흐름은 한국 디자인의 시스템 사고를 한 단계 더 두텁게 만들고 있다.

한글 폰트는 이미 한국 디자인의 가장 단단한 자산이고, 다음 10년 동안 그 자리를 더 깊이 다질 가능성이 높다. 디자이너가 본인 작업에서 한글 폰트의 결을 의식적으로 다루고, 그 결정을 글로 남기고, 본인 포트폴리오에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사례를 의도적으로 포함시키는 작업이 누적되어 갈 때, 한국 디자인의 다음 풍경은 디자이너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한글 폰트가 만든 자리에 디자이너 본인의 자리를 더하는 작업이 다음 10년 한국 디자인의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다.

한글 폰트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한국 사용자에게만 의미 있는 자산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글 폰트의 자모 구조 자체가 글로벌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의 토대에 새로운 기둥을 더한다. 1443년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래 580년 가까이 누적된 시각 자산이, 2026년에도 디자이너의 손에서 새 결로 깎이고 있다는 점이 한글 폰트의 가장 단단한 가치다. 한국 디자이너가 본인 작업에서 이 가치를 의식적으로 다룰 때 한국 디자인의 다음 풍경이 한 줄씩 더 또렷해진다.

한글 폰트는 죽은 적이 없었다 — 다만 더 깊어지고 있을 뿐

이 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종로 동네 책방의 한 표지 앞에서 손님이 폰트 이름을 적어 두던 장면. 그 짧은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은 한글 폰트가 이미 한국 도시의 일상 풍경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우아한형제들·네이버·카카오·여기어때 같은 회사가 만든 폰트, 산돌·윤디자인이 다듬어 온 산업 토대, 독립 디자이너들이 더한 다양성, 서울시·제주도 같은 공공의 기여 — 이 모든 자산이 합쳐져 한글 폰트의 풍경을 만든다.

한글 폰트가 죽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 시기에 영문 폰트가 디자이너의 도구 상자 앞쪽에 와 있던 적이 있었지만, 한글 폰트는 그 사이 조용히 더 깊어지고 있었다. 2026년 한국 디자이너가 손에 잡을 수 있는 한글 폰트의 결은 십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 결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의 손에서, 한국 디자인의 다음 풍경이 그려질 것이다.

오늘 본인 작업의 표지 한 장을 다시 펴 보자. 그 표지의 한글이 어떤 결로 서 있는가. 그 결을 의식적으로 골랐는가, 아니면 기본 옵션으로 흘러왔는가. 그 질문이 디자이너로서 한글 폰트와의 깊은 관계를 시작하는 가장 작은 첫 걸음이다. 한글 폰트는 죽은 적이 없었다 — 다만 디자이너의 의식적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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